충청남도부여교육지원청 교육지원과장 신 경 희

▲ 충청남도 부여교육지원청 교육지원과장 신 경 희
장마가 북상중이다. 주말 우리지방에도 가뭄을 뚫고 비가 내렸다. 극성스런 녹음의 골목마다 눈물 글썽이는 바람이 비릿한 땅 내음과 몽환처럼 종일 떠다녔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며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꽃들이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을 새삼 느꼈다. 아름다운 것도 참으로 한 순간이다. 흙, 물, 햇빛, 바람의 기운이 모여 꽃이 된다. 열매가 되기도 한다. 그 기운이 다하면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우리네 인생도 그런 거겠지.

어느새 이 나이에 당도할 줄은 정말 몰랐다. 나이는 언제나 낯설다. 어찌어찌하다보니 지금 이 나이에 와 있다. 이쯤 나이 들면 삿된 마음이나 욕심을 내려놓을 줄 알았다. 어깨에 얹힌 슬픔도 인생도 어느 정도 담담히 바라볼 수 있게 되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참 안 된다. 여자가 나이 든다는 것은 운명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사십 넘으면 그냥 엄마이고 아줌마인 줄로만 알았다. 여고시절엔 그랬다. 근데 그 나이 훨씬 넘었어도 그건 분명 아니다. 세월은 흘렀어도 여전히 소녀이고 청춘이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던 유행가 그 노랫말이 맞다. 발랄한 청춘들은 코웃음 치며 인정을 하지 않아도 진짜 그렇더라.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니 장밋빛 두 뺨, 앵두 같은 입술, 탄력 있는 피부만이 젊음은 아니다. 강인한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 무엇보다 시들지 않는 열정이 있으면 나이의 숫자를 떠나 젊음이다. 시인 사무엘 울만도‘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며‘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생은 나이와 상관없이 꿈과 열정을 잃는 순간부터 더 이상 청춘이 아닌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오히려 뭔가 새롭게 부딪혀 보고 배우기에는 그 인생이 짧다는 의미는 아닐까. 그것은 길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 길을 거기서부터 다시 만들어 나가는 열정의 연속인 것이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람들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과 공존하기, 라는 부제가 달린「어른으로 산다는 것」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다. 진정한 어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반추하며 촘촘히 다시 읽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세상은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인다는 어린 시절의 전지전능함을 포기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가능할 것만 같았던 어린 시절의 꿈을 떠나보내는 과정이다. 또 어떤 잘못도 용서받고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도 누군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어릴 적 기대를 포기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바다에 홀로 맞서야 하는 외로움이고 곤고함이다. 글썽글썽 씨방처럼 부풀어 오르는 서글픔이다. 그렇지만 나이 든다는 것이 결코 슬픈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삶을 깊게 이해함으로써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이 사랑스럽고 가치 있으며,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자기 정체성이 있음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물론 강인한 의지와 생각을 궁글리고 시들지 않는 열정이 달려 있어야 한다. 어떤 위협,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멈출 수 없는 끓어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여름날 엿처럼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단풍 들어 붉고 곱게 물드는 것이 고마운 일이란 걸 느끼며 아름답게 나이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놀빛에 닿은 강물이 내 맘처럼 붉다. 누군가는 나이 들어 맘이 붉으면 몸이 힘들다고 했다. 붉은 마음으로 살면 몸이 고단하고, 붉은 마음을 버리면 삶이 권태로운 것, 그것이 인생의 딜레마라 했던가. 감성의 우물을 채워 영혼의 밝은 우물을 갖지 않고 무엇으로 감히 삶의 권태로움을 이길 수가 있겠는가. 나이 들수록 향기롭고 단아한 품격을 갖되 섹시한 감성을 유지한 채 늙고 싶다. 지금 한창인 능소화처럼 고혹적인 아름다움으로 자연의 한 풍경이 되고 싶은 마음. 이것 또한 나이 들어 끈적이는 집착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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