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서면중학교 교장 신경희

▲ 충남 서천 서면중학교 교장 신경희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칠환 님의 ‘새해 첫 기적’ 시의 전문(全文)이다. 이 시는 2012년 12월부터 2013년 2월까지 광화문 교보빌딩 벽에 대형 걸개로 내걸려 화제가 되었었다. 황새나 말처럼 날고 뛰는 재주를 가졌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달팽이나 굼벵이처럼 느려 터졌다고 침울할 이유도 없다. 각자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결과, 살아 존재하는 것이므로 새해 첫날을 겸허히 맞이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리라. 바위의 묵직함을 배우며, 소소함에 감사하고, 잔잔하고 행복한 삶을 소망할 일이다. ‘진정한 기적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운데 잠복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새해 새날들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 왔던 게 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화근이라면 그게 화근이었다. 연말의 바쁜 일상 속에서 여행 계획이 급조됐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은 조바심도 한 몫 거들었다. 그래서 더 정신이 없었다. 여행은 떠나기 전의 설레임과 준비하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은 법인데 그걸 누릴 여유가 없었다. 새 길을 떠날 짐을 꾸리는 일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그렇게 엉성하게 떠나야만 했다. 그래도 좋았다. 오래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떠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늘 바람 가득한 광야를 가슴에 안고 살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겠지. 돌아오기 위해서도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아도 떠나는 것이다.

이스탄불에서부터 이즈밀, 에페소, 파묵칼레, 안탈리아, 콘야를 거쳐 카파도키아에 이르기까지 짧지만 강렬했던 추억의 보따리를 다시 풀어본다. 비행기 안에서 맞은 갑오년 새해는 감격스럽기보다는 피곤하고 힘들었다. 이스탄불 공항에 내리자마자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의 종착역 보스포러스 해협을 크루즈했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예쁜 집들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스탄불 시가지의 모습이 피곤함을 걷어내고 한편의 영화처럼 흘러갔다. 블루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술탄아흐멧 사원은 화려한 스테인 글라스와 내부의 푸른색 타일들로 눈부셨다. 거기다가 대포문 궁전이라는 특이한 뜻을 가지고 있는 톱카프 궁전은 당시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오스만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남달랐다.
터키 최고의 건축가 시난이 황제를 위해 지은 하렘은 술탄과 황후, 황제비, 후궁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비밀의 장소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화려한 내부 장식들이 눈길을 끌었다. 신성한 지혜의 교회라는 뜻의 아야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의 랜드 마크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원의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어 비잔틴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유적이다. 17세기 비잔틴미술의 걸작으로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스테인 글라스와 모자이크 등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이스탄불에서의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볼거리는 그랜드 바자르 시장이었다. 그 규모 면에서도 그렇고, 각종 그릇, 장신구, 테이블, 귀금속이 볼만했다. 종류와 가격도 매우 다양했다. 무엇보다 흥정하는 재미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고대 로마의 유적이 로마보다 더 많은 곳, 게다가 성경에 나오는 유적지까지 일일이 열거하기에 벅찰 정도였다. 십자군전쟁의 보드룸성은 에게해를 중심으로 얼마나 멋지고 잔잔하던지. 너무 아름다워도 눈물이 나는 경험을 터키에서 여러 번 했다. 안탈리아의 녹취 빛 지중해는 더더욱 잊을 수 없다. 통통배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갑판 밑 바다 바닥이 투명하게 빛났다. 어디선가 귀 익은 팝송이 바람결에 묻어오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거센 힘으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흐르는 눈물에 알 수 없는 슬픔이 더해지고, 그 슬픔은 새로운 눈물을 또 밀어 올리고 있었다. 처음 만난 지중해에 그렇게 한껏 눈물을 뿌리고 왔다.

규모와 질적으로 최고의 로마도시 유적지 에페소에는 3층 규모, 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원형경기장, 셀수스 도서관, 하드리아누스,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 제대로 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고전미 흐르는 모습은 우아했다. 세월을 초월해 건축가의 영혼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거기다가 터키 명물 중 거의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세계문화유산인 파묵칼레. 그곳엔 석회봉과 노천온천, 석회질의 온천수가 오랜 세월 산비탈에 침전되어 신비한 백색의 세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하얀 설국에서 온천수에 발은 담고 있는 그런 착각이 일었다.

마지막 코스인 카파토키아에는 자연이 만들어 낸 환상의 기암괴석이 펼쳐진 괴뢰메 골짜기와 피샤바 계곡의 웅장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뾰족한 바위라는 뜻의 천연 요새 우치히사르는 물론, 기암에 굴을 뚫어 만든 동굴수도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박해 받던 그리스도인들의 피신처가 되었다는 지하도시 데린구유를 돌아볼 때는 신이 인간과 그리 멀지않은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도시를 빠져 나오니 모처럼 하늘이 불붙어 타고 있었다. 붉은 색의 찬란한 향연이었다. 자연이 그려내는 거대한 화폭, 어찌 인공의 색이 자연의 색을 당할 수 있으랴. 다음 날, 시린 새벽 다소 비싼 선택 관광인 열기구 탑승의 경험은 전율적이고 대단했다. 그 첫 경험은 아나톨리아나 고원의 기암지대가 만들어낸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여행은 언제나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다. 삶에 새로운 피를 공급하고 심장을 뛰게 만들어 준다. 다 타버려도 좋은, 다 불살라져도 좋을 것만 같은 새로운 열정을 불어 넣어 준다. 그래서 여행은 가진 것을 모두 투자하고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그 어느 곳보다 더 강렬하고 특별한 여정이었다. 돌아보면 모든 게 길이었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인생도. 언젠가는 세계적인 도보 여행가 ‘베르나르 올리비에’처럼 나만의 길을 걷고 싶은 바람이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몸을 던져 한 발 한 발 내딛는 감동을 느끼고 싶다. 걸음 뒤에 숨은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책으로라도 엮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더 없는 행복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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