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 충남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지난 주 금요일 비 내린 후 확실히 달라졌다. 기온이 한 자리 수로 떨어지고 서늘한 날씨가 이어진다. 끈덕지던 더위가 물러나고 비스듬하게 누운 가을 햇살이 너무 좋다. 지난 주말에 가을 빛 따라 부안 변산 해안도로 거쳐 내소사 개암사에 들렀다. 어느 곳을 가든 산들거리는 바람결에 구절초꽃잎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보다 보고 싶었던 코스모스 길 따라 오는 길이 참으로 행복했다.

지평선축제, 벽골제로도 유명한 김제의 코스모스 길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만경 가는 국도에 발길을 멈췄다. 나는 매년 이 길을 한 번은 꼭 만난다. 코스모스 길을 걸으면서 가을을 제대로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꽃잎을 몇 장 따 머리에 꽂은 채 사진을 찍었다. 어릴 적 신작로 갓길에 피어난 코스모스 꽃을 머리에 꽂고 마냥 좋아라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때 가을 하늘은 지금보다 더없이 파랗고 고왔던 듯하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잎 위에 내려앉은 고추잠자리 빛깔 따라 가을볕에 졸고 있던 기억이 더욱 선명해졌다.

가을꽃 하면 국화를 떠 올린다. 하지만 길가에 한들한들 피어난 코스모스도 빼놓을 수가 없다. 도로를 따라 쭈우욱 피어난 코스모스와 황금빛 들판은 가을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원 없이 내뿜는다. 표백 한 듯 청초하며 가녀림 휘감았어도 꺾이지 않는 그 순결함. 신이 만든 꽃 가운데 첫 작품이 코스모스라 한다. 처음엔 마음에 쏙 들게 하지 못하다가 왠지 연약해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아 목을 길게 늘여놓았다던가. 믿거나 말거나 코스모스 탄생설화가 그렇단다. 꽃말은 ‘소녀의 순정’이다. 신의 서툰 첫 작품이라 여겨서인지 빼어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여려서 애잔하고 더 정감이 간다.

어릴 때 나는 코스모스처럼 여리여리하고 사랑스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그 바람과 달리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그만큼 억세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코스모스는 한없이 가늘고 여성스럽지만, 해바라기를 닮아 하염없이 한 방향을 바라보는 꽃이기도 하다. 길가를 스치는 산들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 코스모스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함을 지녔다. 여린 허리를 흐느적거리며 그 큰 가을을 휘어잡고 있는 것을 보면 당연 그렇다. 그러고 보면 이미 나는 어릴 때 꿈처럼 코스모스 닮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마다 고운 빛깔로 익어 손짓하는 가을. 눈길 머무는 곳마다 심장 뛰는 소리 들켜가며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어 가슴에 가을을 적고 또 적는다. 가을엔 자주 누군가 욱신욱신 그립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누군가에게로 이어지던 날들. 코스모스 길을 그리워하는 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유혹. 흔들흔들 꽃 앞에서 웃음 짓던 내 자신을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황금색으로 풍성한 들판도 추수가 끝나고 나면 텅 빈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이 계절은 누구에게나 숙연함 내지 겸손함을 생각하게 한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가을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가을이 겨울과 봄과 여름을 거쳐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겨울과 봄과 여름 동안 헤매 다니다 가을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라고. 이 가을 코스모스처럼 단아(端雅)하게, 코스모스처럼 가볍게, 세월의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코스모스처럼 꺾일 듯 꺾이지 않으며 그렇게 눈부시게 살아가고 싶은 건, 욕심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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