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어느 날 우리 동네도 알몸의 나무들이 일제히 하얀 꽃을 피워냈다. 검은 몸속 어디에 저 많은 꽃 순을 숨겨 두었던 것일까. 서해안 끝자락에 자리 잡은 우리 동네는 언제나 다른 지역의 벚꽃들이 흩날릴 즈음에야 비로소 피워 올리곤 한다. 창경궁과 진해, 하동 쌍계사 십리 벚꽃 길, 순천 송광사 벚꽃 길, 충주호 벚꽃터널, 수안보 벚꽃 길, 경포호 같이
지난 주 어느 날인가. 오랜만에 지역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제자가 찾아왔다. 온라인에 밀려 이래저래 서점 운영이 어렵다는 푸념 섞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살아남기 위해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을 접목해보려 시도하고 있다는 제자가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론 대견했다. 가면서 책 한권을 놓고 갔다. 소위 요즘 베스트셀러란다. 1편은 분명히 읽었을 것 같아 두 번 째 나온‘
완연한 봄인가 했더니 꽃샘추위 그녀가 다시 찾아왔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쉬이 내어줄리 없지. 근데 어쩌겠어. 불어오는 그 바람 어찌 감당할 수 있겠어. 여기저기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며 뾰족뾰족 돋아나는 봄 세상을. 햇볕이 유리창에 착 붙어 온기가 전해지는 오후. 차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며 자주 찾는 카페에 들렀다. 그 곳에 가면 바쁜 일상을 잠시
우수 경칩 지나 다시 봄 봄 봄 봄이 왔다. 일 년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이 멀지 않았는데 꽃샘추위가 만만 칠 않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봄은 기어이 오게 돼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우리 지역의 봄은 언제나 한 걸음 다가왔다 두 걸음 물러나는 듯 안타까이 더디 온다. 남녘 양지바른 꽃들이 질 때 즈음에야 비로소 피어난다. 손바닥만 한
지난해 학교에서 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작은 고민이 생겨났다. 매월 월례회때 주어지는 시간 때문이다. 전 직원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냥 말 수도 없고. 때가 되면 자연스레 고민스럽다. 이번 2월엔‘존재이유’에 관해 말했다. 작은 회의 때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낱말이기도 하다. 존재이유 하면 예전에 유행했던 노래의 구절이 떠오른다.‘알 수
침묵으로 한없이 내려앉은 일요일 오후. 세상이 무문토기처럼 불투명하다. 숨결마저 회색빛에 갇힌 날엔 특별히 그리운 것들이 많아진다. 희끄무레한 하루가 신신파스처럼 욱신거린다. 하염없이 생각을 만지작거리다 시(詩)한 편을 떠먹는다. 오늘의 또 다른 밥이다. 시가 밥이 된지는 오래 됐다. 허기진 배를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 먹기 시작한 것이 시
새해가 되면 누구나 소망을 기원한다. 가족의 건강과, 아이들이 공부 잘했으면, 돈을 좀 더 많이 벌어 부자가 됐으면 하는 등등. 그런데 청양의 새해 소망엔 특별히 더해진 게 있다. 새해 사회·국가에 대한 세대별 소망조사에서 나타난 결과에 의하면,‘더 안전한 나라, 갑 질 없는 사회가 됐으면’을 바란다고 했다. 더구나 20대부터 60대 이상에서 1위부터 3위
지인의 초청으로 나간 자리였다. 벌써 몇 주 전부터 무조건 시간을 비워두라는 말에 다른 일정 다 재낀 터였다. 친분 있는 분들 몇이 만나 저녁식사라도 하려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준비된 송년회장 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우리지역 출신 유명한 서예가 선생님은 서울에서부터 내려와 손수 음향시설 세팅을 마친 상태였다. 각계각층의 출중한 분들이
지난 삼월 학교에서 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장으로 있던 4년 동안 책임자의 자리는 늘 무겁고 부담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근무하게 된 교육청 업무는 어설프기도 하고 챙겨야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어깨는 한결 가볍다.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란 것이 얼마나 버겁고 어려웠었는지를 비로소 느끼며 산다.총 책임을 지는 자리에서 중간 역할로 바뀌었음에
모든 것들이 빛을 잃는 11월의 마지막 주말. 낮게 내려와 앉은 하늘이 잿빛 구름을 안고 헤메이다 두두둑 시작하는가 싶더니 종일 비워 내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불청객 비님이 자주 찾아든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 했던가. 겨울을 재촉한다. 그 곱던 단풍잎들이 길을 한가득 메우고 있다. 잎사귀가 크고 화려하던 나무들은 거의 옷을 벗어 버렸다.
온도가 갑자기 많이 내려갔다. 지난주엔 16년 만에 ‘수능한파’가 고개를 들었단다. 어설프긴 했지만 우리지역은 첫눈도 다녀갔다. 바람도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흡사 한겨울 추위 못지않다. 그럼에도 청사 뒤뜰 은행나무는 아직 가을을 버텨주고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낡고 비좁은 청사에서 황홀함을 안겨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몇 일전 보험회사 직원이 내년도 달력을
하늘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가을비 그 놈이 한차례 진하게 다녀갔다. 덕분으로 가을은 더 깊어졌다. 삶의 무게도 그만큼 두꺼워진다. 가을비 속으로 시월의 마지막 날을 떠나보내고 십일월을 얼떨결에 맞이하고 보니 벌써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됐다. 또 한 해가 이렇게 가는구나. 허탈하기도 하고 뭔지 모르게 쫓기는 듯한 마음이 앞선다.곳곳이 만추 창연하다. 단풍이
‘멈칫멈칫 다하지 못한 사연 푸른 하늘 등에 업고 할랑할랑 피었습니다. 하늘을 마시고 달을 삼킨 향기. 당신은 피해갈 수 없는 아득한 전생 나의 운명. 시월 날마다 그리운 추억의 초원 이슬방울 문채로 흔들립니다.’ 지난해 페이스 북에 사진과 함께 올렸던 ‘구절초 연가’ 습작 시(?)다. 가을비 한차례 다녀가더니 더욱 또렷해진 단풍은 사람들을 물들인다. 붉게
‘시월에 어느 멋진 날에’ 노래로 시작했던 10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스멀스멀 재빠른 속도로 잘도 빠져나간다. 어느새 황금들판이 수확을 서두르고 있다.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아도 이른 새벽 강가 갈대가 바람을 불러오고, 알록달록 고운 빛. 은빛 억새꽃. 사방은 온통 가을 수채화다.깊어진 가을. 한 번 쯤 허리 숙여 국화꽃 향기를 맡고, 고개 들어 파
누군가는 말했다.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다 싶은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청춘이다” 라고. 그런데 이 둘은 진행 중일 때는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그리움이 깃든 추억이 된다.개천절을 낀 황금연휴였다. 빡빡한 직장생활에서 잔잔한 여백을 즐길 수 있는 쉼표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최근 모 일간지를 뒤적거리다가 ‘나를 흔든 시 한줄’ 이라는 타이틀에 눈길을 잡혔다. 배우 강부자를 흔든 시는 이기철의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나무 같은 사람 만나면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로 이어지는 시다. 감상 글은 짧았지만 강렬함으로 다가왔다. 세월과
높아진 하늘. 유리알처럼 투명한 햇살이 세상을 무균 처리하는 청명한 가을 한 낮이 너무 좋다. 파란 하늘에 잘디잔 흰 구름이 정말로 황홀하다. 거기다가 소슬한 바람은 찰 내음으로 그리움을 부추긴다.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풍성하고 아름답게 발맞춰서 찡하게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아름답고 찡한 것이 어디 가을뿐일까. 지난 주 어느‘치매 엄마의 보따리’ 사연이
9월 들어서며 총 총 총 바빴다. 짧은 인연이었다. 정들기 시작했던 사람들과의 마음 정리가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았다. 덜컥 새 임지에서 익숙지 않은 삶에 뒤뚱거렸다. 함께 있을 때는 그 귀하고 좋은 줄을 모른다. 떠날 때야 비로소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사는 게 다 그렇다.어느 책에서 보니까 달맞이꽃이 어스름 달빛에 찾아올 박각시나방 기다리며 봉오리 벙그는
장마철 간절했던 작달비가 요 몇 일간 요긴하게 내렸다. 잘못된 모든 것을 작달비에 씻고 새 희망을 노래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햇살이 오랜 만에 민낯으로 나왔다. 말매미 몇이 모처럼의 둥근 오후를 제재소 전기 톱날처럼 토막토막 켜 듯 울어 댄다. 한낮의 햇살은 아직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수상하다. 바람이 몸이 확실히 가벼워졌
말복 입추 지나 확연히 달라졌다. 그러고 보면 절기라는 것이 참 묘하다. 어느새 찐득거림은 사라지고 하늘 빛깔은 물론, 아침저녁으로 이는 바람에는 가을이 담겨 있다. 우연찮게 몇 일 사무실을 떠나 있었다. 덕분으로 홀가분하고 영혼이 좀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무슨 이유로든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설렘이고 해방감이다. 그동안 나를 떠나 온갖 데를 쏘다니던